아버님이 병원에 가시게 되어 휠체어를 이용했다. 그런데 환자가 많아서 시간은 계속 지체되었고, 다음 약속이 있던 나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이동 중에 휠체어를 급하게 밀었고, 그때마다 아버님은 놀란 듯 손으로 앞을 막는 시늉을 하셨다. “안전하게 밀고 있으니 신경 쓰시지 말라”고 했지만 불안해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그때는 ‘나이 드니 겁만 많아지셨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휠체어에 앉아보니 시선이 달랐던 것이다. 스스로 조작할 수 없기에 내 느낌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었던 것이다. 마치 타인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탔을 때 기분이랄까! 결국 경험해 보지 못한 무지함으로 심통을 부렸던 것이다.
사실 인생은 꽃과 같이 피었다가 지는 것이 아니다. 노화는 퇴화가 아니라 그 순간의 새로운 경험일 뿐이다. 야구도 9회말 투아웃부터 라고 하지 않는가! 승부를 되돌릴 수 없더라도 단지 거추장스러운 잉여의 시간이 아니라 열심히 살아내야 할 순간인 것이다.
작년 도쿄올림픽 폐막식 중계방송을 맡은 KBS 이재후 아나운서의 엔딩멘트는 신선했다. “도쿄 비장애인올림픽 중계방송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사실 장애인 올림픽에만 특별한 수식어를 붙임으로써 이 세상은 장애가 없는 사람들의 것인 양 간주해 왔다.
얼마전 장애인들이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볼모로 이동권 호소를 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비난이 가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왜 비장애인을 불편하게 하느냐”였다. 장애인들의 방식이 옳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관심을 가져주는 현실은 어쩔 것인가! 만약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불편하게 하며 뭔가를 주장한다면 비난하고 끝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오늘을 위한 미래의 희생’과 ‘미래를 위한 오늘의 희생’, 어느 쪽도 옳지 않듯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눈치를 볼 일은 아니고, 장애인이 비장애인을 위해 숨죽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는 갈등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돌봄이 없는 사회에서는 자신도 약자가 되지 않으려면 치열하게 경쟁해야 한다.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 된다. 언제 나락으로 떨어질 지 모를 일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1명을 위한 모두의 희생인 오징어게임이라면 좋겠는가!
(■ 강래경: www.connect value.net 수석교수, (사)한국강사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