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래경 Column) 선진국의 환상을 깨다

강래경

코로나19가 엔데믹 (endemic)이 될 거란 경고가 나왔다. 엔데믹은 토착화된 질병으로 특정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반복 발생하는 풍토병을 의미한다. 남아메리카의 황열병이나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일대의 말라리아 같은 것이다.

그야말로 비정상이 일상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위로가 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좋으련만,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트럼프는 혼란을 부추긴다. 매일 “백신이 나온다, 별 일 아니다, 곧 경제활동을 재개한다”며 희망을 얘기하는데 결과는 늘 고문으로 끝난다.

공동체를 강조하며 인본주의를 외쳤던 유럽도 마찬가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국경을 폐쇄하며 서로를 외면했고, 요양원 노인들의 죽음을 그대로 방치했다. 어쩌면 제국주의 역사에서 보여줬던 그들의 민 낯을 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선진국에 대해 맹목적 확실성이 있었다. 잘 대응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도 그런 착각을 했다. 때문에 코로나 발병 초기에 아시아 국가들의 후진적 행태를 조롱했고, 마스크 쓰기를 혐오했다. 우리 젊은이들이 자신들에게는 치명적이지 않다는 생각에 클럽에서 밀접접촉을 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세계는 사슬처럼 얽혀 있어서 후진국이 힘들면 선진국도 별 수 없고, 선진국들의 어려움은 후진국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젊은이들은 괜찮아도 그로 인해 부모와 조부모, 어린 조카는 괜찮지 않다. 자신과 타인 사이를 배타적으로 선 긋기 하는 맹목적 확실성은 평화적 공존과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코로나 방역은 성공적이었다. 의료진의 헌신과 국민들의 자발적 협조, 그리고 질병관리본부가 솔직한 정보공유를 함으로써 국민들의 현실인식을 높여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태원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하자 성소수자에 대한 맹목적 확실성은 폭력적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코로나가 너무 오래 지속되고, 끝날 것 같던 희망이 깨지면서 짜증과 분노가 컸던 탓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에 가까운 자신의 맹목적 확실성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불확실성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적대와 증오로 세상은 불화의 연속이고, 다툼 또한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강래경 www.connect value.net 수석자문위원. 고려대-이화여대 평생교육원 코칭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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