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를 바탕으로 구축된 초기의 매니토바 경제

400년전인 1619년 8월, 영국의 White Lion호가 “20명의 니그로”와 함께 Port Comfort (후에 Virginia로 변경)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무역업자들이 현재의 앙골라에서 데려온 아프리칸 남자들은 영국에 의해 체포된 후에 즉시 계약직 종사자들과 노동자로 팔렸다.

물론, 이것이 노예 무역의 시작은 아니었다. 1501부터 1875년까지 12.5 밀리언 명의 노예들이 강제로 대서양을 건너 카리브해, 중남미 그리고 남미로 이동되었다.

1619년은 미국에서 노예 매매의 도착을 알리는 해였고, 이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미국에서는 8월 내내 열린다.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African American Life and History (Black History Month를 조직한 단체)에서는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고 있으며, 미국의 의회는 “400 Years of African American History Commission”을 설립했으며, Virginia는 자체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미국의 경제에서부터 미국의 문화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트위트 피드백에 스며 있는 인종차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기초는 아프리칸 노예로부터 온 것이다.

여러분들도 잘 이해하는 것과 같이, 캐네이디언들은 캐나다가 노예 무역의 대량학살 그리고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서양 횡단에서 살아남은 노예의 70 퍼센트는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 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저항을 했지만, 결과는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이었다.

노예들에게 “좋은”날들은 없었다.

캐네이디언 역사책에 따르면, 영국은 노예제도를 금지한 세계 최초 (1807년)의 국가였고, 역사학자들은 Lower Canada(오늘날 퀘벡의 남부지역)와 Nova Scotia 법원이 1790년대 초반에 노예제도를 시행할 수 없도록 했다는 것도 상기시켜주고 있다.

노예선은 캐나다로 노예를 운송하지 않았다. 캐네이디언 식민지에 농장이 없었음에도 노예 교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여러 무역업자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1628년에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가 New France에 도착했고, 1759년까지 4,000명 이상이 왔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1,132명이 아프리칸이었고, 2,472명은 인디지너스 노예였다.

일부의 인디지너스 네이션에서도 노예제도를 시행했었다. Mohawk의 Chief Joseph Brant는 Revolutionary War에서 체포한 아프리칸 40명을 노예로 사용했었다.

노예제도는 누가 실행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혜택을 보았는가에 대한 것이다.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노예에 의존했던 사람들은 가해자이므로 유죄이다.

1670년, King Charles II는 Manitoba 전체, Quebec 북부, Ontario 북부 그리고 사스캐치완, 알버타 및 나누붓 일부분의 영토를 차지했다. 그는 주지사로 활동한 King의 사촌 Prince Rupert의 뒤를 이어 통치했으며, 이 지역을 Rupertsland로 불렀다.

Prince Rupert는 Rupertsland 전역을 대상으로 “교역과 상업의 독점권”을 소유한 Hudson Bay Company (HBC)설립자였다. 무역 독점권을 쥔 HBC는 모피 교역, Red River Colony를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1817년에 Chief Peguis와 조약을 체결하여 Lord Selkirk와 같은 지역에 상인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Red River에 인디지너스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위니펙으로 되었다.

Prince Rupert는 매니토바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어디에서 돈을 벌었을까?

노예 매매

1660년, Prince Rupert는 아프리카 서부의 해안선을 따라 영국으로 무역을 책임지고 있던 Company of Royal Adventurers의 가장 중요한 후원 기업이었다. 금과 은을 주로 거래를 하던 회사는 노예를 매매하는 것이 훨씬 더 수익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1680-86년 사이에, Royal African Company (RAC)로 이름을 변경하면서 매년 5,000명의 노예들을 카리브해와 버지니아의 담배, 설탕 그리고 면화 농장으로 이동시켰다.

RAC는 글로벌 파워를 발휘했고, 노예를 교역하는 기업으로 알려졌다. 1689년에 RAC는 100,000명의 노예를 대서양 건너로 실어 날랐다.

Prince Rupert는 RAC의 수익으로 Hudson Bay Company (HBC)를 설립했고, HBC는 전세계의 노예 농장에서 생산된 담배, 설탕 그리고 면화를 운송했다. 이 물건들이 매니토바에도 왔다.

물론, Prince Rupert 혼자는 아니었다. RAC 통치자였던 James Stuart (요크 공작,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의 왕위 요구자) 역시 HSC의 두번째 통치자로 참여하였다.

HBC가 노예 교역을 통해 제국을 건설한 것도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다. North-West Company (NWC) 역시 참여하였다.

몬트리올에서 Beaver Club (NWC의 전신)을 창립한 모피 교역상 중에 한 명이었던 Charles Chaboillez와 NWC의 초창기 9명 파트너 중에 1명이었던 James McGill도 캐네이디언 노예 교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들은 북쪽으로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착취한 이익을 사용했다.

미국은 노예 교역 400주년을 인식하기 위해 다양한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매니토바의 경제도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1619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Source: 프리 프레스. Niigaan Sinclair Columnist. Niigaan Sinclair is Anishinaa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