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살면서, 배우면서, 때때로 기뻐하면서’

By Olivia Do

오래 전부터 부지불식 간에 ‘살며 사랑하며’라는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분명 어디에선가 본 듯한 이 문구가 왜 그 유명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가 쓴 ‘수레바퀴 아래에서’ 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와 같은 책 제목들과 오버랩이 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머리 속에 머무르는 그 문구가 분명 어떤 책에서 읽었던 것 같은 기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다가 ‘그래, 언제 한번 이 제목으로 글을 써야겠다’ 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제목 대신에 누군가에 의해 이미 사용되어졌을 그 문구를 피하기 위해 나는 잠정적으로 ‘살며 배우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말 그대로, ‘날마다 살며 배우며를 실행하는 나’ 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름대로 ‘합당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나는 그동안 계속 미루어왔던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작심하고 인터넷을 뒤졌다. ‘살며 사랑하며’가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그런데, 검색창에 그 문구를 입력하고 컴퓨터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나는 레오 버스카글리아라는 미국인이 쓴 책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에 관한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또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 지 모르지만, 내가 다음 글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싶었던 그 문구가 – 똑같지는 않지만 – 이미 그 작가에 의해 씌여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나의 관심은 그 작가와 그 책의 내용에 쏟아졌지만, 결론은 내가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원서로 된 책을 꼭 한번 읽어보아야겠다’, 그리고 ‘글 제목을 바꾸는 것이 낫겠다’ 라는 생각으로 일단 정리되었다.

한편, 나는 이렇게 비슷한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사실이 꺼림칙해 – 사실,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내가 쓸 글의 ‘제목을 다시 바꾸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배우면서, 때때로 기뻐하면서’로 다음달 신문에 기고할 Immigrant and Life 의 글 제목을 정했다. 나는 현재 인생을 살고 있고, 끊임없이 배우기를 갈망하며, 그리고 때때로 이렇게 지내는 것을 기뻐하는 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또 배우는 방법에도 끝이 없고, 배움에도 여러 다른 의미가 담겨있다. 과거에는 한 번 배운 것으로 몇 십년을 우려 먹었지만, 지금처럼 정보가 넘쳐 자주 바뀌는 시대에는, 평생 교육이란 말 자체가 전혀 낯설지 않을 만큼 배우는 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 해야 한다.

한 인터넷 블로그에서 혹자는 “언제까지 배우기만 할 것인가? 이제는 지금까지 배운 것으로 자신 만의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너무 오만방자한 생각을 하는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금 시대의 상황을 잘 모르는 것에서 나오는 일방적인, 합리적이지 않은 주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시대에서건, 또 어느 연령대에서건,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배우지 말고 이제껏 배운 것으로 자신의 주장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물론, 그 블로그에서는, 남의 생각만 듣기만 하고 자신의 생각을 확실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썼을테지만.

어찌 되었든, 하나의 정답만 요구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이 한 가지 정답 만으로 여러 사람을 설득하기엔 부딪히는 한계점이 너무 빨리 다가온다. 같은 사건이라도 다각도에서 상황 판단을 해야 하고, 혼자 만의 궤변을 늘어놓는 대신 많은 사람들의 중지를 모으면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정당성과 합리성에 부합되는 자신 만의 주장을 내놓기 위해서는 섣불리 배움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배우는 것과 관련하여,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인용해 온 논어의 첫 장에 나오는 한 구절,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나, 술어편에 나오는 “삼인행 필유아사언 (세 사람이 길을 함께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과 같은 문구는, 배움에는 기쁨이 있으며, 또 배움에는 어느 누구에게서든 배울 수 있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배움이란 책을 통해서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자기보다 더 잘난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더 못한 사람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어린아이로부터 배울 수도 있고, 모르는 남들과의 부딪히는 행동에서도 배울 수 있다. 일상에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요, 자신 만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 논어의 공자가 이미 주창했듯이 – 배움 그 자체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움을 통해 “스스로 성취하고 나아가는 것 그 자체로서 기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체말로, 이민자들은 이민하는 그 순간부터 배우는 것을 너무 쉽게 멈춘다. 낯선 언어를 익히기 위해 잠시 학교 문턱을 넘나들기는 하지만, 정작 이민자로서 향상시켜야 하는 여러 주제와 관련한 배움, 즉, 새롭게 정착하는 나라의 문화를 배운다던가, 사회가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등 매체를 통해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취득하려 한다던가, 그렇지 않으면, 한국말을 잊지 않고 좀 더 고급스런 어휘를 익히기 위해 노력한다던가 등, 이러한 일을 등한시 하는 일은 이민 사회에 마이너스로 작용될 확률이 높다.

마치 영어도 되지 않고, 한국말도 되지 않는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안착하듯이, 이민자들의 지위가 늘 그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다. 배움은 어려운 것일 수도 있고 – 가령 대학교에서 공부를 한다든가 – 그냥 쉬운 것일 수도 있다. 은행에 볼일을 보러온 돈 많은 손님의 거만한 태도에서도, 코캐이시안들에게 아주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한국인이 같은 민족인 다른 한국인을 얕잡아 보듯 하는 말투나 행동에서조차도 배울 점을 찾는다면 분명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배움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 때 그 기쁨은 오롯이 자기 자신만의 것이 될 것이다.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평생 배우려는 마음을 품고서 날마다 달라지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을 닫은 채 배우는 일을 나몰라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유상종, 즉,  끼리끼리의 수준에 안주하며 마치 배우는 일이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의 특권인양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이민자는 이미 오래 전에 정착한 사람들이나 토착민들에 비해서 두 배, 세 배의 노력, 아니 그 이상의 노력으로 날마다 새로 배우고 익혀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전할 기회가 열릴 것이다.

이것이 이민자들이 죽을 때까지 배우려고 해야 하는 이유이고, 이러한 것이 모여 힘이 길러질 때 이민 사회의 지위도 상승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