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석 자에 담긴 의미

(BY OLIVIA DO)

어느날 한 캐네이디언으로부터 이름에 관련된 질문 하나를 받은 것을 계기로, 내 이름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 이 이름을 주신 내 할아버지의 깊은 뜻은 무엇인지를 짚어보게 되었다. 또, 그 한글 이름과 더불어 내가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내 할아버지는 내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실지도 궁금했다.

돌아보니, 나는 이민 와서 한참 공부에 몰두한 시절 내내, 그동안 잊고 지냈던 내 나이 만큼이나 내 이름 석자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에서부터 내 이름 석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냥 불리워졌고, 가끔 김춘수 시인의 “꽃” 이란 시를 읊조릴 때조차 “나는 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다지 큰 의미를 두며 그 의미를 되새겨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할아버지는 그 당시 소학교에 다녔을 정도로 교육의 특혜를 받았던 분으로 일찌감치 글을 깨치고, 한자에도 일가견이 있던 분이었다. 짐작컨대, 내 이름은 할아버지의 그 박학다식함에 기초한, 조부의 사랑이 잔뜩 들어있는 이름이었을 것이라는 데 틀림이 없다. 집안 식구들 얘기를 들어보니, 내 손 위 사촌들 셋 모두 줄줄이 손자인 집안에서, 처음으로 손녀인 내가 태어나 할아버지가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내 할아버지는 ‘은혜 은 자, 벼슬 경 자’를 사용하여 지금의 이름을 주셨던 것이다.

내 이름에 담긴 뜻은 “’벼슬하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돼라”, 또는 “은혜를 입어 큰 벼슬을 하는 사람이 돼라”는 소원이 담긴 것으로, 할아버지는 내가 자라서 높은 벼슬을 얻어 집안을 빛내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다. 과거 옛날 여느 어르신들 못지 않게 내 할아버지도 그렇게 손녀에 대한 꿈을 꾸셨던 것이다. 사실, 어린 시절 나는 조부모의 사랑을 유달리 많이 받고 자란 사람으로 내 이름은 그 분들이 내게 남긴 아낌없는 사랑의 선물이다.

할아버지의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큰 벼슬이란, 바로 정부 고위직을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실 – 그런 의미로만 보자면 – 할아버지의 기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리에 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만 해석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큰 벼슬이 그냥 이루어지지 않듯이, 나 또한 이민 와서 공부하면서 남긴 노력들이 거기에 못지않은 것을 극복한 뒤에 얻은 것이라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자신있게 그 자리를 감당할 정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잠재력과 자신감을 얻었다.

그러니, 나는 이미 할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석사를 마침으로써 은혜를 입어 큰 벼슬을 한 것이나 진배없다. 단지 자리만 다를 뿐,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늘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남편과 격려하는 아이들 덕분에 캐나다에서 새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맨 땅에 부딪히기를 수도 없이 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대학 생활로부터 지금의 소셜워커가 되기까지의 과정 어느것 하나 함부로 다룰 수 없어서이다. 또, 이제서야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내 이름 석자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내가 되었는지가, 그다지 크게 내 할아버지의 뜻에 거스르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내 할아버지는 저 세상에서 오늘의 이런 손녀가 있음을 기뻐하실 것이라는 것에 추호의 의심이 없다.

내 이름 석자와 함께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할아버지가 내게 어떻게 말씀해 주실 것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다. 그것이 한글 이름이든, 영어 이름이든 이름이란 모름지기 그 이름을 가진 존재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인격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나는 자신있게 내 할아버지께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민온 이후로 ‘올리비아’라는 영어 이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내가 영어 이름 하나를 갖기 원해서만은 아니다. 이민 오자마자 사귄 내 몇몇 친한 캐네이디언 친구들은, 내 이름이 올바르게 불리기를 원하는 나의 뜻을 받아들여 늘 내 한글 이름에 최대한 가깝게 부르려 노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캐네이디언들은 나의 이름을 쪼개어 ‘경’은 생략한 채 한 단어만 사용해서 “이은” 으로 부른다. 그들은, 내가 “한글 이름이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한 단어처럼 쓰인다”고 설명해 준 이후로부터는 “인켕”, “언큥”, “윤켱”으로 부른다. 솔직히, 내 이름에 최대한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이렇게 불리면 나는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영어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결국, 나는 “이은”도 아니고, 앞서 예를 들어 말한 그런 이름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매번 가르쳐주기도 어렵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이름이 올바르게 발음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늘 숙제를 준다 – , 또 가르쳐 주더라도 모두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경우에 나는 그냥 이름조차 없는 한 한국인으로 남기 일쑤이다. 왜 나는 그들에게 하나의 꽃이 되면 안되는가? 나는 이름없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젠가 다음 브라우저의 아고라에서 영어 이름 사용에 대해 신랄한 토론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한국 이름을 놔둔 채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사대주의에 기인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버리는 행위이므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측과, ‘자신의 뿌리인 성을 유지하면서 이름만 바꿔 부르는 행위는 정체성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측의 열띤 토론이었다. 이것을 보면서, 이름 사용의 중요성에 대한 일반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좋았으나 너무 정신적인 소모전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글 이름을 쓰든 영어 이름을 쓰든, ‘내가 한국인 피를 가진 캐나다인’이라는 사실이 현재로서는 불변하기 때문에, 항렬을 중요시하면서 부모나 조부모가 준 한국 이름만을 반드시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 이름 석자를 가지고 내 인격에 얼마나 책임을 가지고 살 것인가?’ 를 결정하는 주체자, 즉 “나는 누구인가?” 이지, 이름을 바꿔 부른다고 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버리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내가 한글 이름을 버린 것도 아니지 않는가? ‘버린다’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내 할아버지가 나의 영어 이름 ‘올리비아’조차도 이뻐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한글 이름, 영어 이름 모두를 소중하게 다룬다. 할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담겨 있는 이름과 캐네이디언으로부터 쉽게 인식되어질 수 있는 꽃으로 남는데 큰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이름으로 불리워지든 나는 나로서 존중받는 일이 중요하다.

세상 어느 것 하나 자기의 이름이 없는 것이 없다. 나도 그런 꽃 중의 하나이다. 조부의 사랑이 가득 담긴 한글 이름 석자를 들여다보며,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나는 어떤 의미를 남기며 살고 있는지, 또, 내 이름에 걸맞는 인격을 갖추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어느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뒤늦게나마 다시 생각해 본 내 이름 석자. 그리고 영어 이름. 이름은 한 개인의 존재를 대변하는 상징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주변 사람에게 한 인간의 고유 향기를 남길 수 있는 도구이다.  (❚Olivia Do, HIGH 5s, Social worker, Counseling Hub)